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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리더십을 말하다

[강의 후기] 두번째 미션 - 타종교와 대화하기 [정보영]


우선 직접적인 미션(이슬람)과 간접적인 미션(가톨릭, 불교)을 통해 느낀건 다른 종교에 대한 무지로 인해 가졌던 편견들, 그리고 그들의 눈에서 바라본 기독교의 모습들 점검해 볼수 있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발표를 통해 느낀 것은 결과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웠어요. 이 '다름'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고,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한편으론 다른 종교들의 진리와 믿음을 존중해 줘야 할 것 같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종교를 인정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실 타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고 싶다라는 생각은 한번도 한적이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이 미션을 통해서 내가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 성경적 지식 말고 역사적인 배경, 교리에 대해 난 알고 있는게 거의 없었고. 사람들이 왜 교리 공부를 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느낄수 있었어요, 그들(타종교인들)을 지금보다 더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기 위해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진리의 역사적 배경들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리고 이번 모임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발표하기에 앞서서 '가톨릭, 불교, 이슬람' 이렇게 3종교에 대해 연상되는 이미지나 생각, 느낌들을 무작위로 써보고, 발표 후에 처음 썼던 내용 중에서 생각이 바뀐 부분, 그리고 우리가 쓴 내용 중에 혹시 다른 종교인들이 우리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나눠본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책임과 책임있게 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의 시간이었어요

가톨릭에서 제가 썼던 단어는 ‘기독교에 실망해(또는 싫어) 개종한 사람들’, ‘모순된 삶’, ‘사람에게 의존이렇게 3가지를 썼어요. 첫 번째는 제 주변의 가톨릭 신자들 중 이런 이유로 개종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두 번째는 미사를 드리고 난 후, 모여서 술 마시러 가고 담배피고 하는 모습들이 강해서 그렇게 썼었고, 마지막으로 사람에게 의존한다는 의미는 가톨릭 교인들은 죄를 짓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신부님께 가 고해성사를 하잖아요. 그 모습이 ‘신부님=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들은 신부님께 고백하면 신부님이 그 자리에서 해결책도 제시해 주고, 용서도 해 주시잖아요. 우리는 죄를 짓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1:1로 기도드리지만, 기도드릴 때마다 매번 그 자리에서 응답받기는 힘들잖아요. 그런 면에서 가톨릭의 고해성사가 어쩌면 되게 편해 보이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신부님 앞에 더 쉽게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그렇게 썼어요.
불교에서는 ‘해탈’과 ‘고립’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해탈은 불교에서 자주 쓰는 용어라서 썼고, 고립은 주로 대부분 사찰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 세속과의 단절을 추구하기 모습 때문에 그렇게 썼고, 이슬람에서는, ‘억압’, ‘의무’, ‘불쌍함’이렇게 4가지를 썼어요. 이슬람 국가 대부분의 나라가 가난하고, 그로인해 그 나라 국민의 대부분이 가난과 기본적인 생활도 못하면서 죽어가는 모습들 때문에 불쌍하다고 생각했고, 의무는 태어나자마자 운명으로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선택의 여지없이 믿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썼었어요. 그리고 무슬림들은 죄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다고 들었어요.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할 때는 우리가 느끼는 감사와 평안함 대신 두려움(신에 대한 두려움, 죄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느낀대요. 사랑의ㆍ평안의 하나님이 아니라 두려운 하나님으로 비춰져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발표를 다 듣고 나선 당연히 많은 생각들이 바뀌었어요. 특히 타종교인 들이 크리스천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생각해 볼 때 민망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어요. 가톨릭의 ‘모순된 삶’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겉모습은 거룩함으로 치장하면서 뒤에서는 정말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는 모습들. 불교의 ‘고립’은 우리 기독교인들끼리 다른 종교인들, 세상 사람들은 배척하면서 끼리끼리 어울리지 않았는지. 이슬람의 ‘억압’은 개신교인들이 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죄를 정당화 하려고만 하는 모습과 오히려 대조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 미션을 통해서 제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본건 무엇보다도 종교인으로서 '행동', '실천이었어요. 특히 기독교인으로서는 전도(선교)활동이었구요.
세명의 타 종교인들과의 대화에서 공통적으로 기독교인에 대해 지적한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살리는 '전도(선교)'였던 것 같아요. 그들 모두 그런 기독교를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기독교인으로의 올바른 삶에 대해 간접적으로 지적했던 것 같아요. 직접적으로 쓰자면 당신들은 왜 실천을 통해서 전도하지 않고 대부분 말로써만 요란하게 전도 또는 선교활동을 하느냐 라고.....
사실 이부분에 대해서 많이 반성했어요. 내가 믿는 종교라 그런지 그런 모습들이 정당하다고만 생각했어고, 옳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다른 종교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니 또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보니 그냥 순수하게 우리의 문제를 정당화시켜서 받아들일수많은 없는 것 같더라구요.

사실 기독교인 모두가 하나님을
 보진 못하잖아요.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 성숙해 가는 사람도 있으며,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등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잖아요. 더군다나 비크리스쳔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겠어요. 바로 우리의 모습,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데……. 우리의 삶이 어떤지, 세상적인 사람들보다 더 세상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되었어요. 우리 한명 한명 행동의 결과가 현재 기독교인의 명수 같아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란 말! 평소에 쉽게 쓰는 말이지만, 한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그 어떤 수식어 보다 사용하기 어려운 말인 듯해요.

정말 말씀 안에 행하며 살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렸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가톨릭 팀에서 인터뷰했던 명동성당의 한 신부님의 말씀이 계속 생각나서 써보아요.

우리가 복음을 두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 복음의 가치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좋지 않은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행동할 때는 피를 부를 수밖에 없다. 그 어느 때 보다 대화, 토론, 그리고 예의, 사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존중’ 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을 때 가능한 것 같다. "


암튼 제가 기독교인것이, 예수님의 복음서를 진리로 믿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하게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