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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리더십을 말하다

[강의후기] 그리스도인, 당신의 공감능력은? 타자와 공감하기 (3) _권인호






 

 대사리의 9주차 모임은 마지막 강의인 서강대 철학과 강영안 교수의 강의로 시작되었다. 강의의 제목이 ‘타자와 공감하기’인 만큼 중심적인 내용은 바로 ‘타자’에 관한 것이었다. 강의는 알아듣기 쉬운 단어들로 쉽게 설명되었지만 레비나스의 철학과 타자 중심의 윤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레비나스는 그동안의 서양 철학이 주체의 철학이었다고 말한다. ‘나’라는 존재에 파고듦으로 인하여 다른 모든 사람도 같은 ‘나’로 환원시키는 전체주의. 그것이 서양철학의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주체를 새롭게 정의한다. 주체는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전체화 시키는 인간의 이기주의는 타인을 ‘대접’하는 주체로 섬으로써 해소된다.    



 그동안 내가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했던 것은 나 스스로 안에만 갇혀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고민이 고민을 물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지만 그것은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지속적으로 자신의 내면으로만 파고드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과정으로 나로 하여금 타자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내 속의 ‘나’가 곧 다른 사람의 ‘나’와 같은 것이라고 획일화 시켜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새로운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가?’, ‘나는 오로지 나의 이웃들의 얼굴 속에만 남는가?’



 레비나스는 타자를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도 지배할 수 없는 ‘절대적 외재성’으로 묘사한다. 절대적 외재성이라……. 나는 이 대목에서 놀랐다. 하나님의 존재를 묘사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을 발전시키면 우리는 결국 이웃들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약하고 고통 받는 자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내가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는 다시 앞에서 말한 절대적 외재성이란 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목적성의 존재에 대해 의심한 이유는 내가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만들어 오지 않았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그냥 ‘살아있을 뿐’그 이상 그 이하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타자 중심의 윤리를 고찰하면서 들은 물음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하나님의 거대한 원리 속에서 ‘너’와 ‘나’는 중요치 않고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 돌아간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굳게 믿는 신념이지만 반면에 하나님은 고통 받는 이웃의 얼굴을 통해 드러나시므로 중요한 것은 이웃과 타자를 섬기는 것이 아닌가? 결국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이웃 뿐’이 아닌가?







 비록 혼란스럽고 어려웠지만 나는 ‘죽음’이라는 개념에서 뭔가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어떠한 목적성과 공통점도 찾기 어려운 현실 세계 속에서 우리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피할 수 없는 유일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이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역사’이고 ‘믿음’이 아닐까. 나의 생각이 내 속에서만 끝난다는 생각, 그 한계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타인의 얼굴에 남은 나의 모습을 통해 극복된다. 그 과정에 목적성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신을 만나는 순간일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강영안 교수가 이웃이라는 것이 행위와 행동으로 드러나는 동적인 개념이라고 한 것처럼 이웃은 구체적인 행동 속에서 드러나고 질문에 대한 답 또한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행위와 행동이 중요한데 이것은 이를 실천에 옮길 용기에 의해서 가능하다. 즉 중요한 것은 용기인 것이다. 이것은 용기와 결단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