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하고 또 관계(공동체)에 대한 회의감까지 몰려오면서 나는 이중고를 겪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죽게 만든 사회의 거대한 악의 힘 앞에서, 언제나처럼 어려움이 닥쳐오는 공동체와 사람과의 관계 앞에서 나는 삶에의 소망을 잃어버렸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사회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사랑과 정의가 바로 선 ‘하나님 나라’ 때문이었는데 나는 내가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 같다는 극심한 무력감에 시달렸다. 변화할 수 있다 해도 변화를 향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낙심한 고난의 과정 또한 감내할 힘이 생기지 않았다. 극심한 탈진상태였다. 지겹게 반복되는 신앙의 기복과 지독히도 변하지 않는 사회를 바라보며 그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도 하나님 곁으로 가서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머리로는 생각할 수 있었다. 내가 하는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이 순간에도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반응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기대하는 만큼 변화하지 않는 나의 모습과 사회의 모습에 절망했다. ‘내’ 바람대로 되지 않는 세상, ‘내’가 너무 힘들어서 못살겠고 외쳤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의 능력 없음만을 바라보고 내가 약한 데에서 온전하여지는 주님의 능력을 기뻐하지 못했다. 논리적 귀결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에 동의하지 못했다. 이 세상을 ‘지금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 그러나 머리와 가슴은 함께 움직이지 않는 것이기에 나는 그저 미래의 후회를 두려워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중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 일이 없다는 듯 그냥 웃음짓고 대화했다. 그러면서 이 몸에 밴 행동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마음 속에서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할 수 있구나. 겉으로 보여지는 건 정말 너무나 작은 부분이구나.
월요일 날 IVF 리더 모임을 하면서 이런 내 마음을 나누었다. 그 날 우리가 한 그룹성경공부 내용도 이런 나의 마음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예전 같으면 아!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여 주시는 구나, 놀랍고 감사하다~! 라고 했을 나인데, 이렇게 나의 상황에 들어맞는 말씀으로 나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을 앞에 두고 나는, ‘내 생각일지도 몰라, 그리고 이렇게 회복해봤자 또다시 침체기는 오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을 지겹다 말하고 있는 거였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께 묻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이 상황을 벗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간사님께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게 천국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 예수님은 어떻게 살다 가셨나요. 주님께서는 어떠한 소망을 가지고 이 악하고 악한 땅을 사셨나요. 힘들지 않으셨나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실마리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여전히 오늘도 인터넷에 들어가서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글들을 읽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만 그래도 나는 다시금 삶에의 소망을 회복하고 있다. 그것은 기도의 시간과 사색의 시간 교제의 시간 그리고 독서의 시간을 통해서였다. 그 중에서도 이 자리에서 얘기할 것은 서평의 주인공인 ‘그리스도와 문화’다. 내 마음을 대변하던 구절들 또 내게 말을 건네던 구절들을 적어보는 것으로 마치겠다. 읽은 시기의 영향도 있겠지만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결론적인 비과학적 후기의 내용들에서 뽑았다.
누추하다는 느낌, 수치와 불결함을 느끼는 의식은 자기 자신과 자기 사회의 본성에 대한 객관적인 도덕적 판단에 수반되는 정서적 반응이다.... 죄의 본질... 용서의 빚이 없이 살려는 자세, 자신을 믿고 자율적 존재가 되려는 것... 그것은 온갖 교활한 방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 의(義)를 믿는 도덕적 인간의 모습, 자기 정당성을 신뢰하는 이성적 인간의 모습으로뿐 아니라, 모든 것을 헛되다고 생각하는 절망적 인간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를 소유하고 선택하고 용서해 주는 주님께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참된 종교를 소유한 자가 되고 싶어한다.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탱하지 않으면 그것이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원론자는 역설적인 말로 얘기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인간 편에 서 있지만, 다른 편에서 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그것을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 아래 있지만, 사실 율법 아래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다. 그는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 그는 의심을 품은 신자다. 그는 구원의 확신이 있지만,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지만, 만물이 태초부터 있던 그 모습 그대로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셨으나, 그 계씨 가운데서 스스로를 감추시기도 했다. 신자는 자기가 믿은 그분을 알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간다.
아무리 자기수양을 해도 죄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하지만 죄인이 신적인 자비에 몸을 던지고 오직 그 자비로만 살게 될 때, 그 법이 자연법으로서 가슴에 새겨진다.
그리스도는 입법자로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죄인이요 사랑과 믿음이 없는 자임을 깨닫게 한다... 구원자로서의 그분은 그들에게 있는 자신감을 무너뜨린 다음 하나님을 신뢰할 때 거기서 이웃 사랑이 흘러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이 자기 창조주를 신뢰하지 못하면, 노심초사 자기 유익만 구하다가 남을 섬길 수 없게 되고 오직 자기만 섬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자기사랑의 악순환에 빠져 이타적 행동을 할 때마다 점수를 따고 싶어하고, 하나님을 섬길 때조차 보상을 기대하는 심성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으 ㅣ법과 구속의 행위로 이 악순환을 끊고,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고 실제로 의롭게 만드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그분을 신뢰하고 의존하게 한다. 이 믿음은 그들 속에 창조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에게 반응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루터는 인간 스스로 자기사랑을 극복할 수 없고, 오직 자아가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발견하고 모든 불안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자기를 잊은 채 이웃을 섬길 수 있을 때 극복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환론자는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실존적으로 만나는 분으로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시험하시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가장 깊이 숨어 있는 전염병과 같은 죄, 불신, 사랑도 없고 소망도 없는 상태를 용서하신다. 문화에 대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태도를 가짐. 이원론자는 역사를 신앙과 불신이 싸우는 기간,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 때와 그것이 실현될 때 사이의 기간으로 여긴다. 전환론자는 역사를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들과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담은 이야기로 생각한다. 죽음이 완전히 파멸될 날을 바라는 것과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
타락은 그 말씀(Word)으로부터 현재 떨어지는 것을 일컫는다. 세상에 대한 심판은 지금 일어난다. 그것은 그 말씀의 강림과 성령의 현재적 도래와 함께 주어진 것이다. 제4복음서의 역사관은 “영생”이란 어구를 “하나님의 나라”로 대치한 데 그 특징이 있다... 성령을 통해 아버지 및 아들과 관계를 맺는 현존하는 공동체, 현재의 영적인 예배, 사랑, 하나됨을 뜻한다.... 또 그리스도와 함께하려면 현재의 몸을 떠나야 한다는 사상을 성령 안에서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으로 대치했다.... 이 새로운 출발은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실존적 순간마다 발생하는 것이다...이는 인간의 구체적인 반응이 있을 때 현실화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실로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행위가 변혁되어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고, 아버지와 아들을 영화롭게 하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데 있다.
인간 영혼과 하나님의 관계가 무질서해진 근원적인 죄의 또다른 결과는 인류의 사회적 타락이다. “인류만큼 선천적으로 아주 사회적인 존재이면서도 타락으로 인해 비사회적인 존재가 된 피조물은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생명이 유한한 인간들의 사회는...우리의 공통된 본성으로 인해 서로 묶여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서로 분열되어 있으며, 가장 강한 자는 남을 억압하는데, 모두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정욕을 따르기 때문이다.” 우정은 배신으로 오염되어 있다...가정도 안전한 곳이 아니다. 도시와 제국의 정치질서는 전쟁과 압제로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정의의 집행 자체가 타락하여, 악을 억제하려는 무지한 손길이 도리어 새로운 불의를 저지르는 그런 꼴이 되었다. 무질서는 문화의 모든 국면으로 확장된다...사람들이 사회에서 배우는 그 미덕들 자체도 타락했다. 용기, 신중함, 절제 등이 이기적 목적이나 우상 숭배에 이용될 때 ‘찬란한 악덕들’이 된다. 그러나 이모든 사회적인 악은 기본적으로 선한 창조질서의 존재에 의존해 있다. “타락한 것조차도 반드시 사물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그에 의존되어 있으며, 그 일부를 이루는 것일 수밖에 없는데, 그렇지 않으면 아예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게다가 하나님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타락한 인간 존재를 지배하신다. ”그는 선한 질서를 만든 지극히 선한 창조주인 동시에 악한 의지까지 다스리는 가장 의로운 지배자이므로, 그런 의지가 선한 질서를 나쁘게 사용할지라도 그분은 악한 의지조차 좋은 용도로 사용하신다.“....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영혼을 그 존재와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다시 붙이시고, 그에게 올바른 사랑의 질서를 회복시킨다.... 그 분은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목표가 되시고 사람으로서 우리의 길이 되신다.
인간의 죄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고, 타락하고 비참한 우리의 상태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은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다.” 죄로 만연된 현실과 죄의 파괴성을 감안하면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간구는 거의 부정직한 기도처럼 보인다. “악이 위, 아래, 속에 존재할 때, 당신이 세상에서 그리고 골방에서 그것을 직면할 때, 당신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 안에서 ‘우리의 이름은 군대다’라고 말하는악의 목소리를 들을 때..(온 땅이 그 아래서 신음하는) 그 악을 고치려는 모든 조치가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때, 우리 자신의 내력과 인류의 역사가 생명을 얻으려는 모든 노력을 조롱하면서 우리에게 차라리 자족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라고 종용하는 듯이 보일 때, 이와 같은 기도가 우리의 존재를 갉아먹는 또 하나의 자기기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이같은 타락한 현실과 자기모순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나의 마음을 꿰뚫고 대변하는 듯한 말! 위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의 처방은,
인간이 자신의 죄보다 그분에게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자기의지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 삶의 유일한 중심이 되신 그리스도를 새롭게 증언하는 것밖에 다른 처방이 있을 수 없다. 인류가 자기중심에서 그리스도중심으로 전환되는 일은 모든인간에게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것...나는 죽음의 심연보다 더 깊은 사랑의 심연이 있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겠다. 그 믿음을 잃으면 나는 죽음 속으로, 영원한 죽음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 사랑이 우주를 에워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이상은 나도 모르겠다.(by.모리스)
구원은 개개인이 진정한 중심으로 돌아서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인간은 본래 사회적 존재로 창조되었다....별개의 인간 조직들을 하나의 새로운 보편 사회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조직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보편적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낮아짐과 높아짐의 과정을 거쳐 변혁되는 것을 의미한다. 낮아짐이란 그 몸의 지체들이 자기가 머리가 아님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것이고, 높아짐이란 그들이 머리와 다른 지체들을 섬기도록 각기 특정한 일을 부여받았음을 알 때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진리는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 부분적인 진리다.
인간의 문화 가운데 그리스도가 다스리지 않는 영역이 하나도 없고, 자기 의지 위에 군림하는 그분의 변혁의 권세에 종속되지 않는 인간의 작업은 전무하다는 진리.
“현재 우리 삶의 신성함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고 미래만 바라보는 그런 기대감”은 결코 부추기지 않았다....그럼에도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사람의 영을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분은 우리를 속박했던, 높은 곳에 있던 자만, 정욕, 미움, 영적인 악의 세력들과 대단한 논쟁을 벌이셨던 것이다...바로 인간 존재으 뿌리인 내면 세계에서도 자신의 원수들을 정복하시고, 신비로운 교육을 하셨던 것이다. 이 갈등의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그리스도의 승리의 때도 지금이다...매순간 인간들은 하나님과 관계하기 때문에, 매순간, 매시간이 종말론적 현재다.
전쟁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일종의 도약이 있어야 자기 나름의 ‘최종’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현재 결단을 내리고 당장 순종함으로 그런 결론에 도달해야 할 책임, 필요성, 그에 따른 죄책감과 영광을 모면할 수는 없다.
내 행위는 언제나 창조 사역과 구속 사역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 은혜의 손길에 의해 보완되고, 교정되고,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우리 이웃과 동료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지니는 가치를 언제나 잊어버리는 것, 우리가 절대적 가치 관계와 상관없이 상대적인 가치들을 선택하는 것, 소위 기독교적인 선택이란 것을 불신에 입각해서 내리는 것 등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 때 우리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음을 시인하고, 믿음으로 은혜에 의지하여 그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한편 스스로 억울한 고난을 겪음으로 우리가 입힌 그 상처들을 치료해 주길 간절히 바라야 할 것이다.
신앙은 충성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신이기도하다. 그것은 내면의 열정이 부어지는 그 대상을 신뢰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그 대의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좌절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만일 진리가 나의 대의라면, 나는 진리에 충성할 의무가 있고, 그 진리에 충성하는 모든 자와 그 진리가 신실하게 대하는 자들-진리가 결코 좌절시키지 않을 자들-에게도 충성을 다할 의무가 있다. 내가 그 진리에 충실해지는 길은 그 진리에 묶인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는 데서 충실해지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진리의 힘에 대한 나의 신뢰는 그 대의를 따르는 모든 동반자에 대한 신뢰와 떼어놓을 수 없다. 신앙은 그런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둘러싼 충성과 신뢰의 양 겹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 주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타인들 편에서 충성스런 행위를 할 때 생기는 일종의 신뢰심이다...신앙은 초월적 대의를 공유하는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 그분이 자신에게와 형제들에게 충성스러웠던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지켰다는 것,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것, 그 권능의 존재가 신실하므로 그리스도의 신실함도 권능을 갖는다는 것, 우리로 이 땅에서 살다가 죽은 후 인생 저 너머에 있는 인생을 유산으로 받도록 선택하신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
우리의 신앙, 우리의 충성, 우리의 신뢰가 아주 작아서 언제나 신앙 없는 상태로 빠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앙의 분량이 너무 적어 우리가 늘 그것을 긍정하면서도 부정한다는 것을 아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실존적인 현 시점에 신앙 안에서 의사 결정을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 신앙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배척했음에도 그분이 늘 신실하게 대해 주신 그 많은 신자에 의해 우리가 교정되고 용서받고 보완되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어느 한 인물이나 집단이나 시대도 보편 교회와 동일시될 수 없음을 유념하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우리가 그 안에 몸담으면서 부분적인 일, 상대적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의 교회도 존재한다는 것을 유념하면서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세상의 구속자가 되셨다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세계(인간의 업적)가 은혜의 세계(하나님 나라)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참 긴 내용이지만 어떤 부분을 강조하기엔 모든 부분이 다 나의 마음이었고 나의 인식이어서 다 옮겼다. 결국 답은 간단하다. ‘하나님 중심’을 지키는 것. 예수님의 본을 기억하며 그 길을 담담히 따르는 것. 그 때에 나와 사회는, 나와 공동체는 화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