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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대장정

[서평]그리스도와 문화 - 김수정


 

[서평]그리스도와 문화

김수정

  
리처드 니버는 정말 탁월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문화속의 상대적 가치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방법을 너무나 잘 설명해주는 책이었다. 정말 어렵지만 말이다.

그가 5가지로 분류한 기독 윤리의 유형들을 속속들이 다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을 평가하는 잣대로서 활용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독윤리의 유형들을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하는데 도움을 주고 궁극적으로는 나도 그러한 유형중 상대적인 하나의 가치관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게 되는 겸손이 목적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읽었다.


  일단 유형들을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새로운 법 유형(문화와 대립되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동해 계시된 가치관만이 타당하며 잘못된 윤리를 가진 세상과 분리되어 내세를 지향하는 유형

***자연법 유형(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가치관들을 이성의 관점에서 해석, 교회와 문화는 융합관계에 있고 그 둘이 규정하는 선과 법은 동일선 상에 있다. 기독교적 규범과 본질은 문화가 말하는 가치 중 최상의 가치이자 이상형이라고 여기는 유형

***조형적 유형(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문화(자연에 계시된 가치관)로는 복음을 다 이해할 수 없고, 단지 수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함, 결국 문화와 복음은 불연속상에 있어 서로를 위한 지침을 제공해주주지 못한다. 그것은 복음이 영적 귀족적 윤리인 동시에 자연의 가치관 또한 복음 아닌 인간의 노력으로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짐

***왕복운동 유형(문화의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자연과 문화를 추구하는 것 또한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요구이지만 인간은 자연속의 요구 실천에서 하나님의 요구 사항(복음)을 실현하지 못함을 깨닫고, 반대로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실천하다가는 문화를 버리게 되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이중적 상황에서 왔다 갔다 하는 존재라고 보는 유형

***전환론적 유형(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 우리의 이성을 타락하여 우리가 일궈내는 문화들은 어그러졌지만 결국 참된 질서 안에 있음, 복음을 통해 궁극적 문화의 가치를 발견한 후, 그 하나님의 계시가 이성을 회복시키고 기존사회를 변화시켜나간다고 보는 유형, 신앙은 형이상학적 성격과 도덕적 성격을 동시에 지님.


  확실하진 않지만 리처드 니버는 이 유형중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에 자신의 신념을 두고 있음을 책은 설명해주고 있다. 그 입장의 두 가지 분명한 뼈대를 가지고 이 책을 이해하고 마음에 담고 싶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니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존재하는 무엇이든 선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적극적인 문화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절대적 신념을 버리고 인간적 상대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의 가능성에 진심으로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이웃을 향한 상대적 정의의 행사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이다. 물론 이것 또한 이 책에서 말하듯 나의 이웃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불신앙의 또다른 모습이자 나의 가치들을 절대화시키는 교만함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자 하나님의 절대적 가치를 조금만 느슨하게 붙들라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가 절대 아니었다.

  자유주의 신앙이 주창하듯 성경적 지혜는 현대 사고와 문화에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모든 면(파괴적인 면까지 포함된)과 그의 주권의 토대위에서 떠나 이루어지면 그것또한 불신앙의 또다른 모습이다. 난 가끔씩 정말 기독교적으로 봤을때도 선한 가치들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정작 신앙적 행위들을 소홀히 하고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 선한 가치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었다. 때론 그래서 헷갈렸다. 하지만 사회복음운동의 실수처럼 그러다간 어느새 모든 것이 인간가치척도로 판단이 되고 어느새 좋아 보이는 하나님나라의 가치들은 자기들의 운동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되어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절대적 가치과 상대적이고 문화적인 가치들이 양립할 수 있는것일까? 죄수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일을 예로 고민해보며 좋은 해답을 얻었다, 죄수는 분명히 정의에 있어 어긋난 행동을 한 사람이지만 , 그에게 예의를 갖추고 그에게 가할 처벌 중 일정부분을 제한시키는 규범을 만들고 하는 등의 상대적 정의는 충분히 행해질 수 있는 일이다. 상대적 통찰과 의무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배합된다고 타협에 빠질 소지는 없다. 공통분모가 없는 것들 사이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또한 절대적 표준은 그 자체로 타협될 수 없는 원리이며 오직 어기는 것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상대적 정의를 행하는 것이 상대주의화 될 순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문화적 행동이 상대주의화 되는 것은 다른 말로 또 다른 상대적 가치가 절대주의화 되었기 때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웃과 형제에 대한 일정한 윤리적 규범이 경시되고, 그 이웃과 하나님의 관계가운데의 절대성에 초점을 두는 것은(사실 제3자가 알 수도 없는 부분) 거룩한 하나님의 군사로서의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그것을 그 형제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다. 반대로 기독교적 선택(배려나 예의 평화 등)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불신에 입각한 인간적 상대주의라면 철저치 하나님께 믿음을 구해야 한다.

  절대적 가치(하나님과의 수직관계) 그리고 상대적 가치(이웃과의 수평관계)는 결국 성경에서 말해진 부분이다. 복음은 통전적이고 그것을 불가능 한 것이 아니다.


  책을 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내 심장을 뛰게 한 결론적인 말을 새겨본다.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며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배타적 신앙을 포괄적 삶으로 표현하고자 애써라’

‘무한한 절대성 아래 나의 모든 상대성을 받아들여라. 하지만 나의 상대성으로 인해 나의 모든 선택들에 자신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현재적 삶에서 믿음의 확신과 겸손한 태도로 신앙을 고백하며 결정들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리처드 니버의 치열한 고민과 연구..융의 이론까지 차용하여 세상의 문화적 산물들을 활용한 멋진 학자. 그를 통해 하나님이 뜻에 대한 고민의 과정에서 이렇게 자세하고 머리 아픈 연구와 분석이 속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론이 하나님의 말씀에 향해 간다는 점에서 더 확고하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고전의 힘은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