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적 리더십을 말하다

[강의후기] 포용과 배려의 사회적 리더십 (4)강지혜

안녕하세요^^ 기도후원자 여러분!

날씨가 조금 풀린 듯 하죠?

이번 주말에는 인천 집에 다녀왔더니 또 기도편지가 늦어졌네요~

기도편지 쓰는 게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또 촉박하지만은 않은 일이여서 이렇게 결국 촉박해질 때 시간을 내서 쓰게 되는 것 같아요.(단순한 말을 어렵게 한듯;)

어쨌든! 기도편지는 언제나 정성들여 쓰고 있다는 거~ 느껴지셨나요?^^


이번 주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몸도 별로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입석으로 서울로 가느라 조금 힘들었습니다ㅜㅜ 그래도, 이제는 익숙해진 건지-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기윤실 사무실에 막상 도착하니 이렇게 올 만한 기쁨이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강의는 진솔이가 다니는 숭실대 교양학부 김은혜 교수님께서 오셔서 ‘이 시대의 키워드: 포용과 배려의 리더십’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솔이가 부러웠다고 할까요..ㅎㅎ 숭실대가 기독교 대학인지라 좋은 신앙인들이 교수로도 참 많이 있는 것 같아 참 부럽습니다. 김회권 교수님의 강의도 한 학기 동안 들을 수 있었다고 하니~ 부러움이 더 커지네요ㅎㅎ


오늘 강의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내가 일생을 바쳐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치를 실현할 21세기.

따라서, 이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근대(20C)는 영혼, 정신, 이성, 합리성, 개발, 성장, 경쟁의 가치가 지나치게 추구되었다.

현대(21C)는 몸, 육체, 감성, 비합리성, 신비, 영성, 나눔, 섬김, 배려, 회복, 치유, 돌봄, 양육과 같은 근대에 억압된 부분들이 폭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너무나 많다.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의 삶을 생각해보라!

대표적으로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제 1,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신뢰는 급격히 무너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의 가치들의 한 가지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21C의 이슈들은 배려가 기본이 되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는 가치들이라는 것이다.


배려란, 실천해야할 가치 그 자체이기 보다는 기독교적 가치들을 실천할 때에 반드시 베어있어야 하는 태도이다.

배려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이다.

동일한 가치를 추구한다해도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


기독교의 진리나 하나님에 대한 비판보다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비판이 99.9%를 이루고 있는 우리 사회를 생각해 보자. 우리의 태도로 인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선한 가치들조차 외면당한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는커녕 왜곡당하고 있다.


Ⅰ. 기독교에서 배려가 중요한 이유


기독교의 진리의 핵심: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근본적으로 타자 중심적이다. 혼자서 잘 사는 것으로는 불충분.

가장 구체적인 하나님 사랑이 이웃사랑이다. 이웃은 기독교의 실천적 현장이다.

본 회퍼가 말하길, 교회는 타자를 위한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인은 타자를 위한 존재라 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은 내가 타자를 위해 살겠다는 고백과 같다.

나는 타자를 위해 살겠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왜 타자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기 때문이다.

빌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타자를 위한 삶의 정점이 바로 십자가였다.


Ⅱ. 배려의 사전적 의미: 을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


자기를 위해서 마음을 쓰는 것을 배려라 하지 않는다.

배려는 상대방의 필요를 알아야 할 수 있다.


배려를 잘 실천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써야 한다.

마음을 잘 쓴다는 것은 곧 마음이 예민해지는 것이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마음에 민감해지고 그 마음을 읽게 된다.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하는 초월은 신앙으로 가능하다.

훈련하지 않으면, 노력하지 않으면, 신경쓰지 않으면 사랑을 표현하는 것조차 자기중심적이 되는 인간. 그래서 마음을 소통하는 능력을 훈련해야 한다.

마음을 계발하기 위해서 눈물 흘리는 것을 주저하지 말자.

그리고, 구체적인 사랑의 현장으로 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신 것처럼.

이러한 타자 중심적 기독교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의미있는 삶을 살게하고, 나를 더 풍요롭게 기쁘게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것이다.


Ⅲ. 사랑한다면 사마리아인처럼


누가 이웃입니까? X /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입니까? O

주체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이 시대에 강도만난 자의 입에서 우리가 참 이웃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와야 우리 신앙의 진정성은 증거될 것이다.

신앙과 삶이 분리된 그리스도인은 감동을 줄 수 없다.

감동을 줄 수 없다면 전도는 불가능하다.



Ⅳ. 배려의 원리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베풀기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기.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기.

값싼 동정을 넘어 공감하기

도덕적, 윤리적, 율법적 삶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으로 결단하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이 곧 예수님께 한 일.

겸손과 낮아짐으로.


덧붙여서,

성경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윤리적 문제라면 연기시킬 수 있겠지만, 이는 신앙, 구원, 영생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결단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약간이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마음의 공간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 중에 거하실 때에도 어머니를 생각(배려)했던 예수님.

부활의 영광을 위해서는 십자가를 져야한다.



이후에 계속해서 강도만난 자가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정의의 문제가 적극적인 배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강의가 제 신앙을 다시금 핵심으로 다가서게 한 것 같습니다.

나는 얼마나 내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지극히 작은 자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는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내 행위를 보시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가.


아무리 핑계를 대고 미사여구로 포장해봐도

이웃사랑이 빠진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나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나의 삶의 의미는 이웃사랑이며

내 삶의 성숙은 이웃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러한 가치를 좇다보면 하나님께서 제게 걸맞는 직업을 허락해 주시겠지요.

직업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가치를 좇고 있느냐. 내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느냐- 인거죠.


저 또한 21C를 살아가는 20대 청년으로서

비전에 대해서, 진로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강의를 듣고 나니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보이네요. 참으로 감사한 시간입니다.


저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신뢰하는 제가 되기를, 더욱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훈련하는 제가 되기를 기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