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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리더십을 말하다

[강의후기] 장애 인권과 신앙인의 자세_ (6)강지혜


 

안녕하세요^.^ 평소보다 늦게 인사를 드립니다~~

이번주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서 편지가 조금 늦어졌네요.

일주일이 정말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지난 금요일에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사무총장 배융호 목사님께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강의 제목은 '소수자'라는 넓은 개념이었지만, 배융호 목사님께서는 소수자 중에서도 '장애인'에 대해서 이야기들을 풀어놓으셨습니다.


먼저, 장애란 무엇인가? 부터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장애라 하면 신체적, 기능적인 장애만을 생각하곤 합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장애의 측면은 '사회적' 장애입니다.

UN에서 장애를 정의하기로 신체적 손상, 기능의 손실, 그로 인한 사회적 편견을 포괄합니다.

(제가 학교에서 청강하고 있는 수업이 하나 있는데, 바로 '특수교육'입니다.

그 수업에서 배웠던 내용이기도 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미 한번쯤 배운 내용이었지만 여전히 내 의식속에서 장애란 신체적, 기능적인 면이 주가 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막연히지만 가져왔던 생각들을 새로운 생각으로 대신하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어쨌든, 사회적 장애란 사회적인 편견과 같은 사회적인 환경이 장애를 장애되게 한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강의하러 오신 목사님께서도 휠체어를 타고 계시는 장애인이셨는데, 강의실로 오시기까지 4명의 건장한 청년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건물에 계단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만약 엘레베이터가 있었다면 목사님께서 혼자서도 충분히 4층까지 <정상적으로> 올라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의 배려가 없었기에 목사님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결국, 사회가 장애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장애는 우리의 편견을 없앰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서 없앨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에 대한 편견 중에 대표적인 것들을 무엇일까요?


첫째로, 장애는 선천적이다-라는 것입니다.

장애의 원인을 조사한 결과 후천적요인에 의한 것이 89%(52.4%가 질환-수치가 높은 것은 의학과 과학의 발달로 옛날같으면 죽을 정도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 살 수 있게 된 영향이 있다고 합니다- 36.4%가 사고)였습니다.

원인불명이 6.3% 그리고 선천적 요인이 4% 였습니다.

장애는 약 90%가 후천적요인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로, 장애의 문제는 복지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지는 신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신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기본적인 복지가 충분치 않은 우리나라의 경우 복지문제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는 이 문제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 장애'를 없애기 위한 사람들의 의식변화가 필요합니다.


셋째로, 장애인은 무능력자거나 초인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대중매체에서 접하는 장애인에 관련된 소식은 양극단으로 나뉘어지게 되는데요, 그것이 바로 위와 같은 것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받아 절대적으로 도움을 바랄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놓인 무능력한 장애인의 모습으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장애를 극복하고 엄청난 결과물을 만들어낸 장애인을 믿을 수 없는, 대단한 사람으로 띄워줍니다.

그러나, 현실은 위와 같은 양극단의 사람들보다는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러나 사회의 배려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장애인의 삶은 어떠할까요? 일반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소득은 장애인과 일반인이 2배 차이가 나고, 취학률은 장애70% 일반95%, 고용률은 장애44% 일반69% 였습니다.

취학률이 낮은 집단이 고용률도 낮아지게 되고 이는 소득의 저하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취업차별 42%, 교통수단불편68%, 보도장애물로 인한 불편53%로 높은 차별과 불편 속에 살아가고 있었고, 중증장애인의 90%가 부모 등 오직 가족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장애인에겐 재활 패러다임에서 자립생활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재활패러다임이란 장애를 문제, 극복해야 할 것, 비극으로 보고 이를 '보상'하기 위한 사회정책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임시방편이며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비해, 자립 생활 패러다임은 장애인을 무지한 사회의 집단적 희생자로 보고 개인적 보상보다 억압을 줄이려는 움직임입니다.

장애인이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잘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립생활(Independent Living)의 의미는 "삶에 대한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타인의 개입 또는 보호를 최소한으로 하여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장애인 당사자가 참여하는 과정"(미국장애인자립생활협의회)와 같은 정의가 있습니다. 여기서 타인이란 부모님까지도 포함합니다. 어찌보면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가장 큰 개입을 행사하는 것이 부모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름아래 장애인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흔히들 장애인은 생각과 감정도 없는 것처럼 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장애인도 우리와 동등한 사람입니다.

그들도 그들에게 단순한 물리적인 편의만 제공해주는 시설에서 나와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들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립생활 패러다임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서 장애인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누가복음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단순히 '도움주기' 만이 아닙니다. 해방하고 놓아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비장애인이나 장애인은 하나입니다.

고린도전서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입니다. 장애인은 '너희'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차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불친절과 과잉친절. 평범한 친절을 베풀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이가 어릴 수록 편견을 쉽게 없앨 수 있기에 교육이 중요합니다.

저같은 경우도 배우고서도 그것을 쉽게 제 머릿속에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생각이 굳을 정도로 나이를 충분히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경우 새로운 사실로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용이합니다.

입시 위주 교육에 쫓기는 아이들에게 장애인 인권, 소수자 인권을 위한 교육을 따로 시간내서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가정의 경우, 가정 자체가 위기에 봉착하고 있고, 시청률에 급급한 방송에서는 더더욱 이러한 교육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가능한 한 곳이 있으니 바로 '교회학교'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장애인에 대해서 올바른 시각을 갖도록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위해서 올바른 시각을 갖도록 가르친다면,

그 아이들이 자라서 만들 사회는 더욱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가까운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학생들의 경우 단순 봉사보다는 장애인 인권 회복을 위한 일에 함께 하거나,

우리 안에서의 교육(스터디, 세미나 등)을 이루는 경험이 보다 값질 것입니다.


이렇게 강의를 듣고, 몇 가지 토론 주제들을 가지고 짧게 토론을 하는 것으로 대사리 4주차 강의가 끝났습니다.

무지함이 얼마나 큰 폭력의 수단이 되는 지 새삼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 입장에서 선의라고 그것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선의가 될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물어야만 알 수 있는 일이겠죠.

오늘의 강의를 통해서 좀 더 소수자들을 동등하게 대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주 독서과제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인데,

배운 강의와 어울어져 저의 시각과 마음을 더 넓혀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게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늘 영육간에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