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른 것을 난생 처음으로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신비 경이감 호기심 탐구심
이런 것들이 아닐까?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동물들은 사람의 다름에 대해 두려워하고 피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동물을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하여 공격해 죽이기 시작한다면 그 뒤로 동물들은 사람을 보면 두려워하고 달아나게 된다. 그러나, 동물들이 만나는 사람 모두가 다 동물들을 공격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동물들에게 사람이란 존재는 파괴자. 침략자. 죽음. 으로 다가오게 됐을지 모른다.
그들을 공격하는 세력이 우세하게 남아있는 한 그들의 인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닭둘기(?)를 보면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비둘기가 요즘처럼 사람이 자기 옆을 지나가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은 많은 시간동안 경험으로 사람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소수의 사람은 비둘기를 해친 적도 있겠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비둘기를 해치지 않았기에 대다수의 비둘기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서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이와같지 않을까.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서로를 만나면 본래 드는 감정은 신기함. 호기심. 탐구심과 같은 것이지 두려움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슬림에 대해서 접한 몇몇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두려움만을 증폭시켰다고 생각한다. 매체의 무서운 점이 몇몇 일부의 이야기를 전체가 그러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비둘기는 사실을 체득함으로 사람에 대한 태도를 형성했다면 우리는 과장되거나 왜곡된 사실을 그저 들음으로써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진 않았는지.
여자와 남자.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다르다면 가장 다른 존재.
그러나, 동시에 가장 닮은 존재.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왔으나 남자와 같지 않았다.
남자는 그 차이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남자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는 여자를 통해서 자신도 바라볼 수 있었다.
기독교인도 무슬림과의 차이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슬림의 모습에서 기독교인인 자신의 모습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테러로 표현되는 무슬림의 폭력적인 모습에서
억압과 착취에 대한 침묵과 무관심으로 표현되는 기독교인의 폭력을 보게 된다.
인간으로서 사랑받고 존중받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동일하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를 지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너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은
'너의 차이를 지으신 빚으신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분쟁을 위해서, 같아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차이도 하나님께선 원하시는가?
연을 만들고 있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각기 다른 모양과 살과 색을 가진 연을 만들었다.
가오리연, 방패연 등..
그 아이는 다양한 연을 만드는 것을 기뻐했고, 모든 연을 나름의 개성이 있었기에 모두 다 아겼다. 누군가 아이의 방패연을 가오리연처럼 만들려고 하면 아이는 매우 화가 날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그 모든 다양한 연들을 열정과 애정을 담아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그 연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알기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연을 만든것은 아이라는 사실만은 누가 뭐래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와 같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의 실패(얼레, bobbin)를 잡고 있는 것이 연으로 날고있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라는 것을 '은혜로' 먼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실패가 누구의 손에 들려있는지 모르는 연들도 있다.
우리는 그런 연들에게 네가 어떻게 해서 날 수 있는지 나를 보고 생각해봐. 너의 실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바라봐. 라고 이야기 해 줄 수 있을 순 있겠지만 우리 자신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나처럼'만들려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실끼리 엉켜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추락해버릴 수도- 혹, 연싸움처럼 상대방 하나님과 연결된 실을 끊어버릴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잘 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가장 바른 방법이다.
상대방이 어떠한 신념을 믿고 있든지 간에 그것이 '신념'으로서 상대방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게 되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차이를 존중해주며 대화의 문을 열고, 그래도 대화를 하지 않았을 때보다는 발전이 있게 된다고 믿는다.
"강요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며, 영혼의 참다운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신앙의 자유가 선행되어야 한다."
p133발췌: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신다."(시145:9)
하느님의 이 자애로운 면모는 이스라엘 백성의 커다란 적국이었던 이집트와 아시리아 역시 언젠가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하느님의 선택을 받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에서 가장 장엄하게 묘사된다.
하느님의 이 자애로운 면모는 이스라엘 백성의 커다란 적국이었던 이집트와 아시리아 역시 언젠가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하느님의 선택을 받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에서 가장 장엄하게 묘사된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인 십자가로 예언은 성취되었다. 다만, 그 방식은 다양하지 않았고 오직 예수님 한 분이였다는 것이 필자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점이다. 그건 우리가 다양성을 배척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히신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는 낯선 자들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임재하심을 볼 수 있고
그들의 육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 모두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봐야만 한다.
그리고,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두려워하고 열등하게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먼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그리하셨다. 우물가의 여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셨다.
아이가 죽은 아버지의 필요에 귀를 기축이었다. 수많은 병든 자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셨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다. 위로하셨다. 살리셨다. 고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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