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적 리더십을 말하다

[강의 후기] 장애 인권과 신앙인의 자세 (3) _권인호





 본격적인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내가 겪은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이번 대사리 4주차 아카데미에 참여하기 위해 수업을 마치고 학교 앞 지하철 안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나는 평소에 걸음이 빠른 편이다. 게다가 출근길 지하철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는 많은 인파를 비웃어주기라도 하듯 빠른 걸음으로 인파를 헤쳐 나가는 버릇이 있다. 내가 1호선 온수역에 도착했을 때 역은 매우 한산했지만 나는 한 걸음에 계단 쪽으로 내달렸다. 계단 쪽으로 다가갈 때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장애인 리프트가 작동하는 소리였다. 휠체어를 탄 한 장애인이 지하철 근무자의 도움을 받아 리프트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나는 순간 계단을 내려가면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내 두 다리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급하지 않을 때도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듯 짜증스럽게 서두르는 나의 발은 그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내내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장애인 리프트가 작동하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리프트가 작동할 때 줄곧 노래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꽤 오랫동안 지하철을 기다렸음에도 그 노래는 줄곧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그 사람과 나와의 차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팠다. 마침내 지하철이 도착하고도 그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자,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내가 이런 일화를 소개한 것은 단순히 장애인의 삶을 동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과 나 자신의 ‘차이’를 느껴보자는 것이다. 위의 경험은 그런 차이가 몸으로 절실하게 다가왔던 경험이었고 그래서 앞서 언급한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무조건적 동정을 비판하기에는 우리 사회에는 아직 그 차이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날 배융호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사무총장의 강의는 장애인에 대한 나의 무지함이 많이 깨진 날이었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노인이 되는 것은 장애인이 되는 것’이란 말이었다. 노인은 남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노인이 된다면 남의 도움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신체적 기능의 저하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노인이 되는 대도 이런 사실을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 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데미에 참여하면서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바로 미디어와 교육의 영역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여러 편견 중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바로 대중매체가 만들어 낸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다. 대중매체에서는 장애인을 무능력자인 동정의 대상으로 삼거나 한계를 극복하고 성공한 초인, 두 종류의 장애인으로만 비춘다. 사회 속에서 보통의 우리들처럼 희로애락을 느끼는 장애인은 미디어에는 없는 것이다. 미디어의 영역이 나의 전공, 그리고 나의 미래와 관련되어 있는 만큼, 이런 문제는 나에게 더욱 절실하고 급한 것으로 다가왔다. 기회가 된다면, 장애인의 사랑, 장애인의 일탈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의 영역은 교육이다. 강의에서도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는 넓은 의미에서의 교육이 언급되었다. 결국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교육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미래를 향한 비전이 있고 변화를 추구한다면 그 미래를 이끌어 나갈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보여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 입시 위주의 교육이 통탄스럽기까지 했다. 함께 사는 세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교육,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교육이냔 말이냐. 우리의 공교육이 좀 더 ‘다양한 사회’,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에 맞추어졌으면 한다.


 장애인에 대한 정의의 변천에서는 장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장애가 신체적, 정신적 요인으로서 판단되었지만, 최근에는 장애라는 개념이 사회적인 의미로서 다양한 장벽과의 상호작용 내지는 완전하고 실질적인 사회 참여가 저해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장애라는 개념이 결국 나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말한 장벽이라는 것은 사회나 개인이 만들어 낸 장애에 대한 편견과 정의이고 결국 이 정의로 인해 장애인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은 이 장벽과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체가 불편한 사람에게도 충분히 이동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그 장애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환경이 장애를 만드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의 후에 우리는 서로 각자의 소수성과 장애성, 다수성을 정리해보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소수이고 장애라고 인식되는 것이 상대적인 것임을 깨달았고 서로의 상대성을 알고 다름 자체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강의는 단순히 장애인에 관한 강의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 나아가 일상에서 인식되는 사소한 장애가 나의 편견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한 배융호 사무총장이 던지고 갔던 질문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예수께서 이 시대에 오시면 장애인을 위해 무엇을 하실까’
‘예수께서 이 시대에 장애인으로 오셨다면 어땠을까’

 이 질문은 현대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물음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예수가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배운 것을 토대로 생각해 보자면, 결국 우리는 소통을 하기 위한 존재들이고 그 소통의 과정은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정하는 방법은 무한한 창의성의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서로를 인정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