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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리더십을 말하다

[관련정보] 서민을 파는 사람들

중앙대학교 경영대학 박찬희 교수의 이코노미스트(2005.11.07) 기고글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Philosophy 를 갖고 계신 분이기도 하고, 제가 대사리의 Offline Activity 를 논의하다가 몇번 답답함을 느낀 적이 있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불편한 진실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알려드리고자 '퍼'옵니다. 특히,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사회적 약자' 에 대한 학습이 진행되는 만큼 '누가 사회적 약자인지'에 대한 분명한 구분과 정립이 필요할 겁니다. 또한, 옳은 말보다 그럴듯한 말이 먹히는 것이 교회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라는 것 역시 대략적으로나마 판단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저작권 관련해서는 박찬희 교수께 허락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경제 기사에는 ‘서민’이란 단어가 자주 나온다. 사전적 의미와 좀 달리 ‘덜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정작 누가 ‘서민’에 해당하는지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좀 더 많은 이에게 나눔과 배려를 실천하려는 좋은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은 ‘서민’이란 말로 정파적 이해를 가리고 있음에 불과하다. 심지어 똑같은 사람이 경우에 따라 ‘서민’과 ‘기득권층’ 사이를 오가기도 한다.

자가운전자는 세금 낼 때는 서민이 아니다. 그래서 가뜩이나 경유나 LPG에 비해 비싸게 매겨진 휘발유값에 60%에 달하는 세금을 낸다. 여기에는 교육세까지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더구나 쏘나타 한 대가 2000만원이면 세금이 이래저래 800만원이니 이런 애국자가 없다. 회사원이나 자영업자도 사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빚내서 차를 산 경우도 있고, 막노동에 빚으로 공부해서 유리지갑 세금을 내고 있으면 ‘혜택’이란 말을 붙이기가 부끄럽다. 그래서 (‘팔자 좋은’ 회사원은 일단 접어 두더라도) ‘서민’에 해당하는 영세 자영업자에게는 보조금을 주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매출이 적어야 영세한 것인지 빚이 많아야 영세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자영업의 정의도 실은 어렵다.

그런데 때로는 ‘혜택받은’ 자가용차들이 ‘서민의 발’로 둔갑한다. 얼마 전 TV 뉴스에서는 ‘바쁜 서민들이 잠시 견인지역에 세운 차를 구청이 마구 끌어간다’는 고발기사가 있었다. 한 평에 수천만원 하는 땅에 애써 낸 길을 불법 주차로 막아 놓은 업소 주인과 주차 대행업체는 단속이 ‘서민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한다. TV에 나온 여자 연예인이 벌금을 ‘주차요금’이라고 하듯이 길을 주차장으로 아는 것이다. 이러니 불법 주차는 이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삶의 현실’이 되고 있다. 그 피해는 버스 탄 ‘진짜 서민’과 업소 근처에도 못 가고 피로에 절어 귀가하는 자가운전자에게 돌아간다.

중소기업주는 ‘서민’이고 ‘약자’인가? 중소기업 보호대책의 보이지 않는 비용은 실은 ‘자비로운’ 소비자가 (잘 모르고) 일부 부담한다. 로또 복권 수익금의 7%는 중소기업 진흥에 쓰인다. ‘인생역전’의 꿈으로 복권을 사는 사람이 ‘어려운’ 중소기업주를 돕는 것이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 고용 문제가 나오면 직원 2∼3명의 영세업체도 갑자기 기득권자가 된다.

노점상은 모두 ‘살기 위해 거리에 나선 불쌍한 이웃’이니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가? 누가 받아가는지도 모호한 자릿세를 포함해 하나 차리는 데 5000만원이 넘게 드는 노점상이 ‘서민’인가, 같은 돈을 빚내서 임대료와 세금을 내며 장사하는 그 앞의 떡볶이 가게 주인이 ‘서민’인가?

함께 사는 사회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마당놀이판과 달리 현실에서는 가진 것이 무조건 죄도 아니고 덜 가진 것이 특권이 될 수도 없다. 냉엄한 삶의 과정이자 결과일 뿐이다. 배려는 법과 원칙을 통해 서로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지킨 후에 하는 것이다. 더구나 누가 진정한 약자인지를 가리는 일은 매우 어렵다. 정책은 이럴 때 가장 보편적인 최소한의 배려를 한다.

즉, 정말 사회적 약자를 가려서 보호하고 그 부담은 최소화하는 것이다. 자기 돈 아니라고 대충 ‘서민을 돕자’고 하면 막상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헷갈리고, 결국 약자의 모습을 잘 연출해 이익을 관철할 수 있는 집단만 신난다. 정치판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바쁘고 힘들어 모여서 외칠 시간조차 없는 사람들만 골탕을 먹게 된다. 그런 나라는 점점 더 못살게 되고, 밑천 짧은 사람만 죽어난다.

박찬희 중앙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