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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리더십을 말하다

[강의후기] 말이 통하는 소통의 사회적 리더십 (1) _신상린

강의 내용을 간락하게 되짚어본다면, 이의용 중앙대 겸임교수는 본 시간을 통해 소통의 필요성과 방법에 대해서 설명했다. 특히, 그는 IQ, EQ에 이은 SQ(Social Quotient)라 명명한 Human Network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인간 관계, 특히 사회성에 있어 관계성을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였으며, 그것의 현재 상태를 점검하는 데에 Some activity in the class 를 진행하기도 했다. 강의 내용 대부분은 일반 서점의 교양 부문이나 생활 부문에 쌓여 있는 '대화의 기술', '나는 사회인이다', '지금 전화하라' 등의 제목을 겉표지에 큼지막하게 써놓은 책들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카피는 아닐 것이 렉쳐러가 쓴 대부분의 책들의 제목 역시 그와 유사하다. '세상을 바꾸는 곱하기 리더십', '말이 통하는 거리를 산책하고 싶다', '고정관념은 깨도 아프지 않다' 등이 그의 명함 뒤 저서 목록을 장식하고 있다. 해당 강의 관련 자료는 본 블로그에 업데이트될 것이기에 자세한 강의 요약은 제외하겠다.

들어가며.
일단 배경을 보자.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 교회에서는 교인으로, 사회에서는 사회인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크리스천들이 대부분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지적하지 말자. 누구나 안다. 그리고 충실하게 행동하고 있다. 사실 그런 행동의 이유가 각 집단이 갖는 특성을 위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리처드 마우(Richard Mouw)가 이야기 하는 '시민적 교양' 혹은 '크리스천의 시민 교양'을 갖췄기 때문은 아니다. 렉처러는 각 집단의 특성에 위배되어 그 집단에서 외톨이가 되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방법론적 접근으로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듯 했다. 본인의 이해가 부족했거나,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렉처러가 소통의 목적성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는 없기에, 자의적 판단이라고 해도 문제는 없을 듯하다.

본질은 아니지 않나?

일반적인 한국 교회(장로회)의 내부 구조를 살펴보자. 먼저, 사회처럼 계급이 존재한다. 평신도가 있고, 집사가 있고, 권사가 있고, 장로가 있다. 그리고, 세력이 형성되어 있다. 또한, 족벌, 파벌 등 다양한 규모의 이익 집단들이 산재한다. 이유는 하나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커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여기에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작용한다. 아울러, 규모가 큰 교회일수록 Social Position 이 교회 내에서의 위치와 정비례되는 경우도 있다(i.e. 소망교회). 물론, 여기에는 경제 개념도 투입된다. 헌금 많이 하고 밥 잘사고 사람에게 잘하면 좋은 소문이 난다. 교회에서는 봉사가 중요하고, 헌신이 중요하다고 홍보한다. 그러나, 피택 선거 치뤄보면 현실은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세상으로 눈을 돌려보자. 노숙자와 경제학 박사가 대화가 통할리 없다. 공통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심 분야가 다르다. 노숙자는 당장 오늘 점심을 뭘 먹을까라는 걱정에 바쁘지만, 경제학박사는 세계 경제 걱정하느라 바쁘다. 조선일보와 한겨례신문을 보자. MB를 보고 조선은 과감한 결단력과 확고한 추진력을 가졌다고 칭송하고, 한겨례는 독선적이며 주위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걸 봐도 다르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나의 경우를 살펴보자. 고등학교 때 죽고 못살던 친구들. 대학 입시 성공 여부에 따라 졸업 후 우정의 지속 여부가 결정된다. 대학을 갔어도, 대학 랭킹에 따라 달라진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누군가 하나는 희생한다. 주종(主從) 관계에 가까운 친구 사이라면 성립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종(從) 성격의 친구는 훗날을 기대한다. 언젠가는 내가 신세질 일이 있을 거라고. 물론 이 모든 관계에 있어 당사자들이 직접적인 의도를 갖고 핸드링(Handling) 한다고 생각치 않는다. 다만, 거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존재한다고 봐야한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가치 판단 혹은 이익과 손해라는 셈 등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격차들 간의 균형(Equilibrium)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런데도 예쁜 표지의 교양서적들은 소통을 통해 사회 구성원간 격차가 해소될 수 있다고 한다. 아니라고 본다.

왜 본질에는 접근하지 않지?
이러한 배경에 있어 소통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렉처러가 강조한 SQ가 서로 다른 Social Position 에서 활용이 가능한지가 의문점으로 자리 잡았다. 현실은 복잡하고 냉담한데, 그저 소통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소통을 잘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사회 계층간 계급이 존재하고 입장의 차이가 있고 관심 분야마저 다른데 소통이 될리 없다. 동상이몽(同牀異夢) 정도가 아니다. 이상이몽이실(異牀異夢異實)이다. 물론, 렉처러가 강의 말미에 소개한 소통을 위한 6가지 actions 에 대해서는 공감이 갔다. 소통을 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양보하고, 희생하고,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다음 질문은 '무엇을 위해, 왜, 소통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누가'할 것인가' 였다. 인생이란 불공평하다(Bill Gates said). 출발선이 다르다. 그렇기에 과정도 다르고, 결과는 당연히 차이가 난다. 그렇게 다른 배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성장한 사람들에게 소통을 하기 위해 그 6가지를 사용하라고 설득할 수 있는가? 아니라고 본다. 용산 철거민 사태를 보자. 철거민 당사자들은 갈 곳이 없다. 서울시는 용산이 서울시 정비 대책 및 재개발 기반 조성에 있어 시발점이다. 둘 다 갈 곳이 없다. 양보, 희생, 감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론은 약자편이 된다. 그리고 철거민들은 감정에 호소하고, 진보 매체는 그걸 받아쓰고, 보수 매체는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고 피력한다. 반대편인 서울시는 사회 이익적 접근을 피력한다. 양보도, 희생도, 감수도 없다.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결국은 소통 위의 힘, 공권력이 작용하고, 그로 인해 희생이 발생하는 예정된 수순을 밟는 것이다.
 더 심각한 현실은 그 둘이 서로 원하는 건, 설득이지 소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 남을 이해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소통이라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소통을 위한 조건, 방법이 아니라, 소통이 안될 수 밖에 없는 원인과 이유를 분석하고, 여러 case를 통해 소통이 아닌 다른 설득 가능한 방법론적 접근을 계발한 후, 소통에 임해야 한다. 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통하고 난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단어로 정의하면 협상(Negotiation)이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설득하려 한다. 틀림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상황 분석이 되지 않았는데, 무엇을 해야할지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자연히 빗나가기 마련이다. 결국, 저 혼자 생각하고, 행동하고, 만족한다. 그러니 예의나 교양을 차릴 겨를도 없다. 여기에 무례함까지 추가가 되면, 한국 사회가 말하기 좋아하는 개독교 완벽 풀코스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래도 현실을 모르고 부활절 기념 합동 예배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성대하고 웅장한 규모로 펼쳐진다.

나오며.
마케팅에서 이야기하는 5C(Collaboration,Contentware,Commitment, Communication,Channel)라는 것이 있다. 작금의 기독교의 현실에서 복음이라는 제품을 세상이라는 시장에 내보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돌이켜봐야 한다. 경영학 교과서 찾아보면 목차에도 나오는 이론을 우리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어떻게 협력하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어떤 성과와 목적성을 갖고 있고, 어떻게 소통하고 있고,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그냥 저의 생각이 중요하고, 저의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감사와 은혜로 맞이해야 할 부활절 아침. 전남에 사는 40대 크리스천 정모씨가 모 암자 대웅전에 침입해, 알루미늄 파이프로 불상을 전시한 유리창과 받침대, 안에 있던 인등불상 등을 때려 부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우상을 숭배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불상들을 부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비크리스천에게 하나님 믿으라고 설득하지 말고, 크리스천들끼리 먼저 소통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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